한자와 한글 혼용의 이유와 소비자 반응
1970~80년대 한국 음료 라벨을 보면, 제품명이나 브랜드명, 심지어 성분 표기에서 한자와 한글이 함께 쓰인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날 대부분의 라벨이 한글 중심이거나 영문을 병기하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의 한자 혼용은 독특한 시각적 특징을 만들어냈다. 이는 단순한 표기 습관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과 마케팅 전략이 반영된 결과였다.
우선 당시의 문해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는 한글 전용 정책이 이미 시행 중이었지만, 사회 전반에 한자 사용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다. 신문, 간판, 상표 등에서 한자 표기는 전문성과 권위를 상징했고, 제품명에 한자를 넣으면 ‘격’이 올라간다는 인식이 강했다. 예를 들어 ‘박카스(薄荷水)’라는 표기는 제품명 하단에 작은 한자로 병기되어, 서양식 영문명과 더불어 한자어 특유의 신뢰감을 부여했다.
또한 한자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백산수(白山水)’처럼 한자 자체가 주는 의미와 미감을 활용해, 순수함·청정함·전통성을 강조했다. 특히 미네랄워터, 차 음료, 전통 재료 기반 음료에서 이런 전략이 두드러졌다. 소비자는 한자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정통성을 통해 제품을 더 가치 있게 인식했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한자 병기는 차별화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음료 시장은 탄산·과일·건강 음료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었고, 브랜드는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한글·영문을 혼합 사용했다. 예를 들어 ‘동아오츠카’는 ‘포카리스웨트’의 영문 로고 위에 제조사 이름을 한글과 한자로 병기해 신뢰도를 높였다. 이는 일본 브랜드와의 제휴를 강조하는 동시에, 국내 제조사의 책임감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소비자 반응은 제품 성격과 타깃에 따라 달랐다. 중장년층과 고학력 소비자는 한자 표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자가 ‘품격 있는 상품’이라는 인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어린이나 청소년층은 한자보다 한글 또는 영어 로고에 더 쉽게 반응했다. 그래서 아동용·청소년용 음료에는 한자 사용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대신 원색과 캐릭터, 손글씨체가 강조됐다.
한자 혼용은 정보 전달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홍삼(紅蔘) 드링크’처럼 한자를 병기하면, 원재료의 정체성을 더 명확하게 알릴 수 있었다. 특히 지역 특산품이나 한방 재료가 들어간 음료에서는 한자 표기가 성분의 진위와 원산지를 강조하는 마케팅 장치로 기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자 사용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글 전용 정책이 정착하고, 소비자층이 점점 영어·외래어 중심의 글로벌 이미지에 익숙해지면서, 한자는 ‘구식’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특히 젊은 소비자층은 복잡하고 읽기 어려운 한자보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한글·영문 로고를 선호했다.
흥미롭게도 최근 복고 트렌드와 함께 일부 브랜드는 한자를 다시 라벨에 도입하고 있다. ‘백산수’의 경우 한자 로고를 보조적으로 활용해 전통성과 차별성을 강조했고, 일부 전통 음료 브랜드는 70~80년대 디자인을 복각하며 한자·한글 혼용 라벨을 재현했다. 이는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을 제공하는 효과를 동시에 노린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