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이 지배하던 시절의 라벨 컬러 의미
1. 원색의 우위 –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색채 전략
1970~80년대 한국 음료 라벨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색상은 단연 ‘삼원색’이었다. 빨강, 파랑, 노랑이라는 이 원색 조합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었으며, 당시 인쇄 기술과 소비자 인식의 한계를 동시에 고려한 최적의 색채 전략이었다. 이 시기에는 컬러 인쇄가 고도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인쇄소에서 구현 가능한 색의 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원색은 단가가 낮고 발색이 우수했으며, 다양한 용도에 전천후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색이었다. 특히 이들 색상은 저해상도의 거친 종이나 비닐 재질 위에서도 비교적 안정된 표현이 가능했기에, 라벨 디자이너들에게는 거의 '기본 팔레트'로 기능했다. 당시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 진열대에서 음료수 병이 눈에 띄어야 했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려면 자극적인 시각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삼원색은 단지 미적 취향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유통환경과 소비 방식에 최적화된 생존 전략이었다.
2. 빨강 – 에너지, 건강, 자립을 상징한 전진의 색
빨간색은 당시 음료 라벨에서 가장 자주 쓰인 컬러 중 하나로, 강장제나 비타민 음료, 그리고 일부 사이다 제품에서도 핵심적인 색상으로 자리 잡았다. 빨강은 즉각적인 주목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활력”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예를 들어 박카스, 비타500 전신 제품, 오란씨 오렌지 맛 등은 모두 라벨 전면에 빨강 계열의 톤을 채택하며, 피로 회복, 면역력 강화, 활기찬 하루 등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특히 당시에는 건강보조 음료가 단순히 기능성 제품을 넘어서 국가 성장과 근로 윤리의 일부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빨강은 이런 집단적 가치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 매우 적절한 색상이었다. 또한, 빨강은 자립과 개척의 이미지도 담고 있어 국산 브랜드 정체성 강화에도 기여했다. 한마디로 당시의 빨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시각화한 ‘기호로서의 색’**이었다. 이처럼 색 하나가 제품 이상의 상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상징 중심적 사고에 기반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3. 파랑 – 신뢰와 청량함, 그리고 근대화의 색조
파란색은 주로 사이다, 청량음료, 생수류의 라벨에 사용되었으며, 기능성보다는 감각적 이미지와 정서적 안정을 자극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칠성사이다’의 클래식 라벨이 대표적이다. 강한 청록색과 파랑의 조합은 시원함을 즉각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브랜드에 일관된 신뢰감을 부여했다. 또한 파란색은 근대화된 도시적 이미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80년대 들어 대도시가 성장하고,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며, 대중교통이 정비되는 등 도시화가 가속되던 상황에서, 파랑은 새로운 삶의 질서와 청결함, 세련됨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이는 라벨뿐만 아니라 광고 전반에서도 파란 하늘, 유리창, 흐르는 물 등의 이미지와 함께 사용되며 하나의 사회적 미학으로 정착되었다. 음료 라벨에서 파란색은 ‘정직하고 깨끗한 기업’, ‘믿고 마셔도 되는 제품’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특히, 대기업 브랜드에서 이 색이 자주 쓰였다는 점은, 파랑이 브랜드 신뢰도와 계급적 가치를 동시에 전달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4. 노랑 – 낙천성과 어린이 중심의 시장 전략
노란색은 주로 과일 음료, 특히 오렌지, 바나나, 레몬 등과 관련된 제품에 사용되었으며, 아동과 청소년을 주요 타깃으로 한 제품군에서 자주 등장했다.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랑은 단지 시각적 인지도가 높은 색상이었을 뿐 아니라, 긍정과 희망, 미래 지향성이라는 사회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어린이 음료 라벨에는 노랑이 중심색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건강하게 자라자’, ‘밝은 내일을 위해’ 같은 모토와 맞닿아 있었다. 또한 노랑은 당시 교육열과 관련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희망의 색’으로 기능했다. 광고 문구와 패키지 문장에도 “성장기 어린이에게 딱 좋은 ○○” 같은 표현이 자주 쓰였으며, 이는 노랑이라는 색이 단순한 과일의 맛 표현을 넘어서, 사회적 책임과 이상적 미래상을 구현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또한, 노랑은 시각적으로 다른 색과의 대비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파랑이나 빨강과 조합될 때 강력한 정보 전달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 라벨에서 노랑은 ‘밝음과 선함’의 대표 아이콘이자, 사회적 낙관주의의 시각적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