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명보다 강했던 색의 기억 – 소비자 뇌리에 각인된 라벨 컬러의 힘
1. 시각 기억과 색채 – 뇌는 글보다 색을 먼저 기억한다
인간의 뇌는 글보다 이미지를 더 빠르게 인식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인지심리학 연구에서 증명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색상은 이미지 기억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1970~80년대 한국 음료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특정 브랜드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노란 배경에 빨간 글씨가 있던 그 음료”, “파란 병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던 음료”라고 설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색은 단순한 시각 정보가 아니라, 감정과 상황, 경험을 함께 묶는 기억의 열쇠였다. 음료 제품의 경우, 짧은 시간 안에 구매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브랜드명보다 색상의 인지력이 구매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특히 어린이 소비자층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는데, 미완성된 언어능력 대신 시각적 경험으로 제품을 인식하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색상은 단순한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기억을 설계하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장치였다.
2. 색채 고착화 현상 – 브랜드보다 먼저 떠오르는 색의 상징성
음료 브랜드가 특정 색상을 고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색 자체가 그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내면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당시 코카콜라는 ‘레드’ 그 자체였고, 포카리스웨트는 ‘투명한 파랑’, 비락식혜는 ‘노란 바탕 + 검은 글씨’라는 이미지가 소비자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이는 단순한 색의 선호를 넘어서, 색상이 **브랜드 인식보다 먼저 떠오르는 ‘기억의 표상’**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색상 고착화(Color Fixation)**라고 부르며, 일정한 환경과 상황에서 반복된 색이 기억 속에서 의미화되는 과정이다. 즉, 특정 색상이 단지 브랜드의 외형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감각적 트리거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강은 ‘달콤함과 자극’, 파랑은 ‘청량감과 안정’, 주황은 ‘과일의 상큼함’으로 인식되며, 이것이 브랜드와 결합되면 ‘감성적 브랜드 경험’으로 기억된다. 결국 색은 브랜드명보다 먼저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되어, 감각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3. 감정 기억과 색 – 라벨 컬러가 불러일으키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소비자가 특정 음료를 기억할 때, 그것은 단지 맛이나 브랜드명이 아니라, 그 음료를 마시던 시기의 정서와 경험이 함께 떠오르는 총체적 감정 기억이다. 이 감정 기억에서 색상은 매우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여름 방학 중 엄마가 사준 아이스 바나나 음료의 노란색, 운동회 날 먹은 사이다의 푸른색 라벨은, 단지 색상의 미적 기호를 넘어서 하나의 시대, 장소,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색은 기억의 장면을 구성하는 시각적 단서이자 감정적 자극이기 때문에, 브랜드 마케팅에서 색상 설계는 제품 전략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70~80년대는 아날로그적 감각이 강한 시기였고, 당시 소비자들은 시각 정보와 감정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하는 경향이 있었다. 색상이 곧 감정이자 경험이 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라벨의 컬러는 단순한 포장 디자인이 아니라, 세대를 연결하는 감정적 기억의 고리이기도 하다.
4. 지속되는 컬러 브랜딩 – 현대 브랜드에 남긴 시각 유산
당시의 음료 라벨 컬러 전략은 현대 음료 브랜드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코카콜라가 여전히 빨강을 고수하고, 포카리스웨트가 청량한 파랑과 흰색의 대비를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한 브랜드 이미지 유지 때문이 아니라, 색상이 브랜드 기억의 핵심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색이 단순한 ‘심미적 선택’이 아닌, 지속 가능한 브랜딩 전략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에서 복고 마케팅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과거 라벨 색상은 '뉴트로 감성'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옛 디자인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색이 갖고 있던 감정적 기억을 재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소비자는 브랜드명을 보지 않아도, 그 색의 조합만으로 ‘익숙함, 신뢰감, 향수’를 동시에 느끼게 되고, 이는 브랜드 충성도로 이어진다. 결국 당시의 색상 전략은 단기 판매 촉진이 아니라, 수십 년을 이어가는 브랜드 기억을 설계한 원초적 언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