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료 시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변화를 겪어왔다. 1970~80년대에는 병과 캔에 선명하고 화려한 라벨이 붙어 있는 것이 당연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무라벨(라벨리스) 제품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무라벨은 말 그대로 제품 겉면에 종이나 필름 형태의 라벨을 붙이지 않은 제품을 말한다. 투명 용기와 단순 인쇄만으로 브랜드를 표현하며, 환경 보호와 재활용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과거 라벨은 제품의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1970~80년대의 라벨은 색상, 서체, 일러스트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칠성사이다’의 녹색 병과 흰 별 로고, ‘박카스’의 파란 바탕과 굵은 고딕체, ‘밀키스’의 하얀 배경과 귀여운 별 일러스트는 한눈에 제품을 구별할 수 있는 시각적 신호였다. 당시 소비자들은 진열대에서 “라벨을 보고” 음료를 선택했고, 라벨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케팅의 핵심이었다.
무라벨 제품은 이러한 시각적 요소를 최소화한다. 대신 병 자체에 각인(엠보싱)을 넣거나, 투명한 스티커를 작게 붙여 필수 표기 사항만 제공한다. 브랜드 로고조차 용기의 형태나 색상, 뚜껑 디자인으로만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삼다수 무라벨’이나 ‘백산수 무라벨’처럼, 이미 시장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일수록 이러한 방식이 가능하다. 소비자는 제품을 집어 들기 전부터 병 모양과 색만으로 브랜드를 알아본다.
무라벨 트렌드가 확산되는 이유는 환경 규제와 소비자 인식 변화 때문이다. 2020년대 들어 정부와 기업은 플라스틱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재질·구조개선’ 지침을 강화했다. 라벨을 없애면 분리 배출이 간편해지고, 재활용 과정에서의 오염 가능성도 줄어든다. 또한 MZ세대를 중심으로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와 ‘친환경 소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무라벨 제품이 일종의 가치 소비 아이콘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무라벨이 라벨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브랜드의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라벨 없이도 소비자가 알아보는 것은, 그만큼 브랜드 자산이 강하다는 의미다. 이는 1970~80년대의 전략과 정반대다. 당시에는 강렬한 색과 도형, 개성 있는 서체로 ‘기억에 남는 첫인상’을 만들어야 했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지 않으면, 라벨의 존재감이 곧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다고 무라벨이 완전히 디자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의 곡선, 재질, 마개 색상, 각인 패턴 등 라벨 이외의 부분이 새로운 디자인 캔버스가 된다. 예를 들어, ‘트레비 무라벨’은 병 목 부분에 독특한 굴곡과 투각 로고를 넣어 빛에 비추었을 때 브랜드가 드러나도록 했다. 이는 과거의 라벨 타이포그래피가 하던 역할을 제품 형태 디자인이 대신하는 셈이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라벨이 강조하던 시각적 ‘소통 방식’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70~80년대 라벨은 소비자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이런 맛이고, 이런 가치가 있다”고 색과 글씨, 그림으로 설명했다. 반면 무라벨은 말수를 줄이고, “우리를 이미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비자는 눈에 띄는 정보 대신, 브랜드와의 관계와 가치관으로 제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무라벨의 확산이 곧 모든 라벨 디자인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신제품이나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 강한 감성 브랜딩을 원하는 제품군은 화려한 라벨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한정판·기념판 제품에서는 과거 스타일의 레트로 라벨이 오히려 차별화 요소로 사용된다. 무라벨과 라벨 디자인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브랜드 전략에 따라 병행되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무라벨 트렌드는 환경과 소비 패턴의 변화가 만든 새로운 디자인 언어다. 과거의 라벨이 ‘시각적 이야기꾼’이었다면, 무라벨은 ‘조용한 상징’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각 시대가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식과 가치를 반영한 결과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오늘날의 브랜드는 과거의 강렬한 라벨과 현재의 절제된 무라벨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오래된 음료 패키지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로 ‘JINRO is Back’— 두꺼비 라벨의 귀환이 만든 문화적 파장 (0) | 2025.08.15 |
---|---|
뉴트로 마케팅의 부상과 라벨 디자인의 귀환 (0) | 2025.08.14 |
한자와 한글 혼용의 이유와 소비자 반응 (0) | 2025.08.13 |
둥근 명조체 vs 각진 고딕체: 브랜드 인식의 차이 (0) | 2025.08.12 |
굵은 고딕체의 남성성과 힘: 박카스, 코카콜라 한글병 비교 (0) | 2025.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