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료 패키지 연구

둥근 명조체 vs 각진 고딕체: 브랜드 인식의 차이

지식과 정보 보따리 2025. 8. 12. 19:00

둥근 명조체 vs 각진 고딕체: 브랜드 인식의 차이

 

1970~80년대 한국 음료 라벨을 살펴보면, 서체 선택 하나만으로도 소비자가 느끼는 브랜드 이미지가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는 디자인적 성격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축이었다. 전자는 부드럽고 품격 있는 이미지를, 후자는 강렬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전달했다. 이 두 서체의 차이는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제품 포지셔닝과 타깃 소비층 전략에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둥근 명조체는 획 끝이 살짝 굽어지거나 둥글려져 있으며, 세리프(획 끝 장식)가 있어 글자 형태가 부드럽고 흐름이 유연하다. 이런 특징은 고급스러움과 동시에 친근함을 주기 때문에, 과일주스·우유·차 음료 같은 부드러운 맛의 제품에 자주 사용됐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델몬트 주스’ 한글 라벨은 초록색 바탕 위에 흰색 둥근 명조체를 사용해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형성했다. 같은 시기 ‘남양 요구르트’ 병에도 둥근 명조체가 쓰였는데, 이는 가정용·어린이용 제품의 친근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 기여했다. 둥근 획이 주는 시각적 완화 효과는 마치 말투가 부드러운 안내방송처럼, 소비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반면 각진 고딕체는 세리프가 없고, 획이 굵으며 직선과 직각이 강조된 서체다. 이런 구조는 단단함과 명확함을 전달하기 때문에, 자양강장제·탄산음료·스포츠 음료처럼 힘과 속도, 현대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제품에 적합했다. ‘칠성사이다’ 1980년대 라벨은 녹색 바탕에 굵은 각진 고딕체를 사용해 청량감과 시원한 타격감을 동시에 전달했다. ‘박카스’ 역시 각진 고딕체를 활용해 남성적이고 기능적인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소비자 인식 차이는 광고와 마케팅 메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둥근 명조체를 사용한 제품 광고는 ‘자연, 부드러움, 건강, 가정’을 키워드로 삼았다. “자연에서 온 신선함” 같은 문구와 잘 어울렸고, 주로 가족 단위 소비자나 여성층을 겨냥했다. 반대로 각진 고딕체를 사용한 브랜드는 ‘힘, 속도, 도전, 쾌감’을 내세우며 남성층과 활동적인 소비자를 타깃으로 했다. “피로회복, 활력충전” 같은 카피가 대표적이다.

 

시대적 배경도 이 차이를 강화했다. 1970~80년대는 산업화와 함께 소비자층이 세분화되던 시기였다. 기업들은 제품별 포지셔닝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서체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글씨체는 브랜드의 목소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를 통해 제품이 말하고자 하는 어조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2000년대 이후 컴퓨터 폰트가 다양해지고 서체 디자인이 정교해지면서,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의 경계는 조금씩 흐려졌다. 그러나 복고 트렌드가 확산된 2010년대 후반부터, 70~80년대 스타일의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가 다시 라벨 디자인에 등장했다. ‘밀키스’ 리뉴얼판은 부드러운 곡선의 고딕체로, ‘칠성사이다’ 복각판은 각진 고딕체로 과거의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결국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의 차이는 단순히 글씨 모양의 문제가 아니라,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성격’과 ‘태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둥근 명조체는 “우리는 부드럽고 친근한 브랜드입니다”라고 말하고, 각진 고딕체는 “우리는 강하고 명확한 브랜드입니다”라고 말한다. 서체는 소리 없이도 브랜드의 목소리를 전하고, 소비자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970~80년대 한국 음료 라벨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서체 하나로 소비자 심리에 깊숙이 침투하는 치밀한 전략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 브랜드가 서체를 선택할 때, 그 속에는 여전히 ‘둥근 명조체와 각진 고딕체’라는 두 개의 상징적 선택지가 자리 잡고 있다.